文化·藝術·觀光

진주를 말하다

진주의 이야기꾼, 장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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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역사에 뿌리내린 진주의 에너지를 믿고 문화·관광·예술 등 다양한 영역으로 세계를 확장하며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활약해 온 장일영 문화관광해설사.

그와 함께 진주성에서 진주를 새롭게 바라봤다.

봄볕이 꽃봉오리를 달구는 오후, 진주성 공북문에서 장일영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 진주성을 걷기로 했다. 그는 한때 경남일보에서 편집부국장과 논설위원으로 일했고 진주문화예술재단 부이사장과 KBS진주 객원 해설위원을 역임했다. ​올해로 20년째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 그는 〈진주지역방언집〉, 〈진주사투리 사전〉을 비롯해 〈천년도시 진주의 향기〉, 〈아침의 현장〉을 펴내어 진주가 가진 문화유산에 주목하도록 대중의 이목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남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일까. 그의 이야기에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생한 장면들이 가득했다. 그는 진주성 내 김시민 장군 동상에 얽힌 이야기부터 진주성 내에 산재한 역사와 자연의 이야기를 걸음걸음마다 아로새겨 주었다.

Q.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십니까?

A. 경남일보 객원 논설위원으로 글을 써오던 중, 잠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05년 봄부터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4월쯤, 진주시청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죠. 전라남도에서 문화원 관계자들이 진주를 방문하는데, 그분들을 안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시간이 있었는데, 관련 자료도 읽어보고 준비해서 진주성을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서울에 있는 금융결제원에서도 진주를 방문한다고 또다시 안내를 부탁하더군요. 그러다 문화관광해설사 교육 과정까지 정식으로 이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올해로 벌써 20주년이 되었네요.

Q.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로 사는 것은 행복한가요?

A.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즐겁습니다.
유치원생부터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들께 나름대로 진주 이야기를 전하며 배우는 데서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주시의 역사와 문화를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봉사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공부를 멈추면 금방 뒤처지기 마련이지요.

누구나 가까이서 배우고 즐기는 
진주가 되도록

Q. 문화관광해설사로서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실까요?

A. 진주시민들이 진주에 대한 자긍심과 애향심을 가질 수 있도록 더욱 깊이 있는 교육 프로그램과 다양한 문화 체험 기회가 확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주를 떠나지 않고 지역 안에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내 고장을 바로 알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발굴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장일영 문화관광해설사는 중영에 봉안된 일종의 타임캡슐인 상량문을 짓기도 하고, 2000년 진주성 내 김시민 장군 동상을 세울 때 동상 비문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김시민 장군 동상을 건립할 당시 역사적 고증에 대한 뒷이야기도 들려주었다.

“1997년 김시민 장군 동상을 건립하기로 하고 이듬해 건립 위치가 논의되었는데, 진주시내 중앙광장에 세우자,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앞 광장에 세우자, 창렬사 뒤쪽에 우뚝하게 세우자, 여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서 현재 이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밀한 고증과 진심으로 지켜낸 역사로
진주의 깊은 이야기를 만나다

“처음에 김시민 장군 동상이 설계될 때 이순신 장군과 같은 투구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투구를 쓰면 이마가 나오지 않았지요. 왜군의 유탄에 이마를 맞아 순절했기 때문에 이마가 드러나는 투구로 다시 설계되었고 동상영정심의위원회의 고증을 거쳐 표준 동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Q. 경남일보 논설위원과 편집부국장을 지내셨는데, 언론인으로서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A. 경남일보에서 논설위원과 편집부국장으로 지내며 지역 언론의 중요성을 깊이 느꼈습니다. 특히 1980년 경남일보가 강제 폐간되는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시기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펜을 꺾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은 매우 엄혹했지만, 오히려 그 시절을 통해 언론의 가치와 자유의 소중함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Q. 진주의 문화를 알리는 것에 대한 사명감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진주유등축제를 키워오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으셨는지, 보람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A. 1980년대 후반부터 개천예술제 유등부장으로 유등축제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초기에는 학생들의 참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습니다만, 학부모들의 반대에 따른 인력난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축제의 역사성과 정체성, 지역사회와 시민들의 주인의식에 따른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유등축제가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세계적 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을 때 나름의 보람을 느꼈지요.

진주사투리사전

  • 지은이 장일영, 조규태, 이창수
  • 펴낸 곳 진주시 진주문화관광재단
  • 발행연도 2021년

진주지역방언집

  • 지은이 장일영
  • 펴낸 곳 금호출판사
  • 발행연도 2002년

장일영 문화관광해설사는 우리가 잊어 가는
진주사투리를 책으로 엮으며
진주의 문화유산을 동시대로 길어 올렸다.

Q. 2002년에 『진주지역 방언집』과
2021년에『진주사투리사전』을 발간하셨는데요, 진주사투리사전에서는 진주사투리에 음성파일까지 더했습니다.
사투리 보존을 위해 이런 노력을 하시게 된 계기와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A. 진주 사투리는 이 지역의 토양 위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서로 소통하고 정을 나누면서 삶을 이어온 자연 언어입니다. 지역의 역사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지요. 그러나 그동안 표준어는 ‘맞는 말’, 사투리는 ‘틀린 말’이라는 인식 속에서, 사투리는 소외되고 사라져 왔습니다. 사투리를 쓰면 여전히 촌스럽다는 인식이 남아 있지요.

지역 사람들의 체온과 숨결, 그리고 얼이 고스란히 깃든 사투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문화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물의 다양성이 파괴되면 자연생태계가 위협받는 것처럼 문화의 다양성이 무너지면 오랜 세월 축적된 전통문화와 정신세계가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소수 민족어가 사라지는 현상은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동안 잘못된 어문 정책과 대중매체의 발달, 지역 간 교류의 증가로, 사투리의 소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서울말만으로는 지역마다 고유한 말맛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서울에 없는 곱고 아름다운 지역의 말을 살려내서 우리 겨레의 말살이를 더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Q. 우리가 지켜가야 할 지역문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진주는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발상지라는 데 주목하고 싶습니다. 진주를 노래한 곡, 진주를 주제로 삼은 노래가 무려 100여 곡이 넘습니다. 이 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창작가요로 알려진 ‘강남 달’도 포함되어 있는데, 진주 출신인 김서정 선생의 작품입니다. 일제강점기 ‘번안가요’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처음으로 한국인의 손으로 탄생한 작사, 작곡된 자주적인 창작가요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진주는 작곡가 손목인, 문호월, 이재호, 이봉조, 정민섭 등과 가수 남인수를 비롯하여 한국 가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수많은 대중음악인들이 있습니다. KBS 장수 프로그램 가요무대가 한해도 빠지지 않고 지방 도시에 내려와서 그 도시의 대중음악인들이 만든 노래를 불러 제작·방영하는 곳은 국내에서 ‘진주시’가 유일한 것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따라서, K-POP의 본고장임을 다시 드러내 조명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진주는 대중가요뿐 아니라 풍부한 물산, 유서 깊은 교방문화, 진주검무와 같은 무형 문화유산, 그리고 선비 정신이 스며든 정신문화까지 고루 갖춘 도시입니다.
‘풍류 도시’로서의 진주의 문화적 위상은 그 자체로 지켜야 할 유산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자산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박물관이나 문화거리를 조성하고, 진주를 노래한 작품을 알리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문화자산들을 재정립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진주만의 이야기와 음악, 예술적인 감성이 숨 쉬는 문화도시로 우뚝 서기 위해서 우리가 이 소중한 지역문화를 함께 지키고 가꿔 나가야지요.

Q. 각자 다른 경험과 문화를 가진 지역 문화기획자와 예술인, 문화예술단체들이 지역의 문화유산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지역의 문화유산을 활용할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조언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지역 문화유산을 활용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그 지역이 어떤 곳인가를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창작을 위한 재료로 접근하기보다는, 그 문화유산이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역사와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진주라는 지역은, 역사적으로나 정신사적으로도 깊은 뿌리를 지닌 곳입니다.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진주의 정신, 시대를 관통해 흐르는 문화적 힘줄 같은 것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려는 마음 없이 작품을 만드는 것은, 깊이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에 대한 애정, 진주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자긍심과 자존심, 애향심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 위에서 예술이 창작될 때, 그 작품은 지역성과 진정성을 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주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지역의 문화유산은 그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이야기이고, 미래로 이어질 문화의 씨앗이니까요.

Q. 진주는 어떤 의미입니까?

A. 진주는 제게 삶의 터전이며 애정과 자부심 그 자체입니다.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니고 옷을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굶주리지 않고, 입고, 배울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진주입니다. 특히 남강은 우리나라에서 드물게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입니다. 남강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때로는 삶의 우울함이나 힘겨움을 흘려보내는 위안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진주성과 촉석루는 진주의 역사와 정체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기에 예사롭지 않지요. 진주는 저에게 있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공존하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유려한 곡선으로 이어진 성곽길을 걸으며 이곳에 살았을 옛사람들을 떠올렸다. 1300년간 뜨겁고도 매웠던 충절과 치열했던 역사, 영광을 온몸에 새긴 이곳, 진주시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내고 다듬고 지켜온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이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