飮食·料理

진주를 맛보다

진양 하씨 단지종택, 뿌리 깊은 맛의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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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목마을은 고려의 충신 하공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진양 하씨 집성촌이다.
580여 년간 이어진 조상과 부모에 대한 섬김의 마음, 옳음을 실천해 온 정신은 진양 하씨 내림 음식에 스미어 있다.

진양하씨 단목세거기념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목마을에는 단목(丹牧)·지내(池內)·신흥(新興) 등 3개 자연마을이 속해 있는데 진양 하씨 집성촌이다.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공자는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동쪽으로 흐르는 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너른 산과 기름진 들판이 품처럼 펼쳐진 이곳- 그 이름은 단목마을이다.

마을을 감싼 산세가 마치 피어날 듯한 모란꽃봉오리를 닮았다 하여, 붉은 ‘단’ 자와 땅 이름 ‘목’ 자를 따 ‘단목(丹牧)’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단목마을은 진양 하씨의 시조인 고려 충신 하공진(河拱辰)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를 중심으로 단목, 지내, 신흥의 세 마을이 어우러진 진양 하씨의 오래된 세거지(世居地)이다.

단목마을은 강과 산, 땅과 사람의 조화 속에서 오늘도 고요히 그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고려 시대 이후 비봉산 자락에 터를 잡은 진양 하씨는 과거 급제자를 다수 배출하며 명문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조선 건국 과정에서 하륜(河崙)의 공적은 가문의 자부심을 더욱 높였다. 15세기 중엽, 하공진(河拱辰)의 13세손인 하기룡(河起龍)이 진주시의 북쪽에 있는 단목마을에 정착하면서 이곳은 진양 하씨의 집성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단목마을 주민의 약 90%가 진양 하씨의 후손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뿌리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마을로 이어져 오고 있다.

단지공 하협의 대를 잇는 
못안마을, 지내(池內)마을

단목마을 안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단지공(丹地公) 하협(何協)이 이주하여 터를 넓힌 ‘지내마을’에 이르게 된다. ‘지내(池內)’는 못 안에 있는 마을, 즉 ‘못안마을’이라는 뜻으로, 이곳은 예로부터 하천의 물을 끌어들여 농경지에 공급하는 천방(川防) 사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단지못’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 종가

지내마을 가장자리에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곳은 단지공 하협이 터를 정하고 집을 지은 자리이다. 이곳을 고를 당시 나무 위에 앉아 있던 두 마리의 학이 앞산으로 훨훨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길지라 여겨 이곳을 학이 터 잡은 곳, 즉 ‘해기터(鶴基)’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대문 앞에는 ‘13대 종손 하순봉, 14대 차종손 하종훈, 15대 차차종손 하수종’의 명패가 나란히 걸려 있으며, 단지종택(丹地宗宅)은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종가로서의 품격과 전통을 지켜내며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4백 년이 삭아서 연치가 허물어졌을까
4백 년이 흘러와 본채의 서까래 중방의 허리
다 닳았을까

부질없는 걱정이다 뒤란의 대밭 더 촘촘한 언어
왼 켠의 산자락 솟아 올린 은행나무
여느 집 연보보다 더 곧은 기록,

아,
정치를 다 놓고 가문으로 돌아온
주인,
종택은 주인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는
조선 유가의 한 필지 성채다, 또는 풍경이다!

강희근. <어느 종택에 가서> 중에서

진양 하씨 단지종택

13대 목림(牧林) 하순봉은 안채인 단지세장(丹池世庄)의 동쪽에 재실을 짓고, 조부인 묵재공 (默齎公) 하정근(河貞根)의 호를 따라 그곳을 묵재재실(默齋齋室)이라 불렀다. 또한 서쪽에는 자신의 호를 따서 목림서실(牧林齋室)을 세웠다. 단지종택의 안채는 좌측부터 온돌방, 대청, 온돌방, 부엌의 순서로 구성된 조선 시대 양반가 주거 구조의 기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성와서실(誠窩書室)
12대 강증순 종부가 시집올 때 맞춘 함과 실제로 사용하신 경대(鏡臺).
(자부) 강증순 (1918~1992)
(장남) 하만관 (1918~1986)

종부는 종가의 맏며느리로서 대를 잇고 전통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13대 박옥자 종부는 시부모님을 기리고 종가를 보존하겠다는 일념으로 종택을 정비했다. 진양 하씨 후손들이 사용하던 유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옛것을 소중히 여기며 종가를 지키고 있는 종부의 강인함에 절로 숙연해진다.

가지제피김치
애호박제피김치

조리방법

가지/애호박 제피김치

  • 1가지(또는 애호박)를 깨끗이 손질한 뒤, 세로로 2등분 자른다.
  • 2가지(또는 애호박)를 찜기에 넣고 가볍게 찐다.
  • 3찐 가지(또는 애호박)를 꺼내 키친타월로 수분을 없앤 후, 채반에 올려 약간 거풍시킨다.
  • 4까나리액젓, 산초가루, 고춧가루, 깨소금, 설탕, 다진 마늘, 실파를 다져 넣고 만든 양념을 알맞게 건조 시킨 가지(또는 애호박) 위에 올린다.
  • 5밤, 파, 홍고추, 청고추를 채 썰어 고명으로 얹으면 완성이다.

백합찜

조리방법

백합찜

  • 1백합 안에 백합살을 꺼내어 깨끗이 씻어 잘게 다진다.
  • 2다진 생새우와 버섯, 양파, 파프리카, 부추, 당근 등 준비된 채소를 곱게 다진 백합살과 함께 넣고, 밀가루와 달걀을 사용해 버무린 뒤 소금으로 적당히 간을 맞춘다.
  • 3백합 껍질 안에 준비한 소를 알맞게 담는다.
  • 4찜기에 넣고 충분히 익힌다.

진양 하씨 13대 박옥자 종부는 귀한 손님이 오시면 으레 장어국부터 올렸다. 제철마다 손맛을 더해 내놓던 내림 음식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안의 품격과 마음의 온기를 전했다.

그중 백합찜은 지금 이맘때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별식이었다. 또 가지와 애호박으로 담근 제피김치는 소화가 잘되어 치아가 약한 어르신들이 드실 수 있는 반찬이다. 소박하고 단순한 찬거리이지만 가지나 애호박을 찐 다음에 남아 있는 물기를 알맞게 건조하는 그 모든 과정에는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언제나 맛있는 음식 앞에 서면 박옥자 종부는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떠올렸다.

음식은 그리움이고 또한 세대를 잇는 기억의 방식이다.

“27살에 서울에서 진주로 시집왔을 때 시할아버님, 시부모님이 계셨고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시할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상투에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으실 정도로 강직한 선비셨어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 남자만 믿고 종부가 된 거지요.”

종부란 하늘이 내린다고 했던가. 종가에 시집온 종부의 삶은 단순한 시집살이를 넘어선 자긍심과 각오가 함께하는 길이었다. 그만큼 나이 많은 집안 어르신조차 13대 박옥자 종부를 깍듯이 대했다.

“엄격한 시어머니의 가르침이 다행히도 든든한 선생님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종부로서 예우해주시고 존중해주셨기 때문에 종부로서의 책임감과 무게도 알게 되었습니다.”

종가의 음식이라고 하면 거창하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580년을 이어온 진주 하씨 종가는 오히려 그 계절의 신선한 재료로 집안의 법도와 격식을 담은 음식을 차리는 데 더욱 정성을 기울였다.

힘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차려내는 종부의 밥상은 가족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어 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마음과 같았다.

진양 하씨 단지종택이 소장한 호산춘추 제조법.
진양 하씨 하응운의 부인 인동 장씨는 호산춘 빚는 방법을 한글로 기록했다.

진양 하씨 하응운(河應運)의 처 인동 장씨는 경상북도 구미에서 진주시 대곡면 단목마을로 시집을 왔다. 인동 장씨는 시집올 때 친정 가문의 내림주인 ‘호산춘(湖山春)’의 비법도 함께 가져왔다.

호산은 전라북도 익산의 옛 이름이다. 호산춘은 익산에서 찹쌀과 멥쌀로 세 번에 걸쳐 빚는 술로 인동 장씨 집안의 가양주로 전해 내려오던 것이었다. 진양 하씨 집안에 들어온 인동 장씨는 이 술을 단지 빚는 데 그치지 않고 후대에도 정확히 전수될 수 있도록 배합 분량, 발효 기간 등 술 빚는 모든 과정을 한글로 자세히 기록해 남겼다.
호산춘은 진양 하씨 종가의 전통주로 자리 잡았고, 단순한 술이 아니라 문화유산이 되었다.

호산춘주라.
백미 닷 되를 흰 가루로 만들어
물 한 말에 그 가루를 섞어 끓여 채운 후,
여기에 누룩 가루 다섯 홉과
밀가루 다섯 홉을 한데 섞어 칠일을 지낸다.

백미 한 말 찹쌀 한 말을 가루로 내어
물 서 말을 매우 끓여 채운 뒤에 가루를 골라
먼저 담근 밑술에 섞어 열흘이 되면
누룩 가루 한 되를 섞어 넣는다.

칠일이 되면 백미 서 말을 흰 가루로 내어 술밥을 찐다.
이 술밥에 물 서 말을 끓여 채워 둔 다음
밑술에 섞어 칠일을 지내고 냉수 서 말을 부어
칠일을 지낸 뒤에 먹으면 냄새가 코를 찌르느니라.

2024년 10월 창립한 경상남도전통주보존회는 ‘진양 하씨 호산춘주 복원팀’을 신설해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호산춘주의 복원을 위한 연구와 양조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호산춘주를 단순히 옛 제조법대로 만든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술이 만들어진 계절과 사회상, 그때의 문화가 어땠는지를 함께 분석하며 섬세한 제법의 차이를 알아간다.

‘진양 하씨 호산춘주 복원팀’ 최인태 씨는 “진양 하씨 종가에서 빚어오던 가양주이기에, 국내 토종 밀인 앉은키밀로 만든 누룩을 사용했다”며 “손님 접대를 위해 물을 부어 양을 늘린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호산춘주를 한 모금 머금자, 묵직한 질감 속에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은은한 꽃향기가 번지며, 마치 다시 봄이 찾아온 듯했다.

오랜 시간 이어진 가양주의 맛을 완벽히 재현해 내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과제다. 그럼에도 가양주 복원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가양주 속에 삶의 향기와 전통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종가에서 차려지는 음식은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다. 그 식사 자리는 한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손님과 이웃과도 기꺼이 나누는 마당이며, 공동체의 품격과 가치를 보여주는 무형의 언어이다.

그래서 진양 하씨 단지종택 13대 종부의 밥상에는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뿌리 깊은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 밥상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음식을 이어가는 일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지켜내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종가의 음식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야 하는 이유이다.